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은 자연과학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자연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문학에 대한 형식적인 정의(definition)다. 인문학을 인문학답게 해석하자면 확장적, 발전적, 상상적 시각이 필요하다. 첫째, 인문학이란 물음이다. 세상과 나에 대한 성찰적 질문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고, 행복한 인생인지, 나의 꿈은 무엇인지, 나를 알기 위한 질문이고, 세상을 알기 위한 질문이다. 문은 그래서 글월 문(文)이 아니라 물을 문(問)이다. 인문학(人文學)은 인문학(人問學)이다. 물음은 상상력을 키우고, 꿈을 성장시키고, 나를 성장시킨다.
둘째, 인문학이란 눈이다. 사회를 보는 눈이고, 타인을 보는 눈이다. 사회는 정의로울 수도 있고, 개판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타인은 친구도 될 수 있고, 적이 될 수도 있다. 맨눈으로 볼 때의 세상과 안경 낀 눈으로 볼 때의 세상은 다르다. 안경도 도수에 따라, 오목렌즈냐 볼록렌즈냐에 따라 세상은 달리 보인다. 셋째, 인문학은 핀셋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는 핀셋이다. 기억은 우중충할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다. 숙달된 의사가 들고 있는 핀셋은 정교하고, 정확하고, 치밀할 수 있다. 그러나 어설픈 선무당이 들고 있는 핀셋은 사람 잡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인문학은 핀셋이다.
핀셋에 솜을 묻히면 상처를 치료하는 도구가 된다. 인문학은 힐링이다. 상처를 잘 아물게 하고, 질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되돌려주는 중요한 도구다. 넷째, 인문학은 공감능력이다. 나의 말에, 나의 표정에, 나의 생각에, 나의 글에 누군가 공감해주는 것보다 더 달콤한 것은 없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카톡에 올린 글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으면 행복하다. 공감은 사랑을 만들고, 연대를 만들고, 세상을 바꾼다. 인문학은 공감능력을 성장시켜 준다.
인문학의 범위
문사철로 불리는 문학, 역사, 철학이 전통적인 인문학의 범주다. 이것은 좁은 의미의 인문학이다. 넓게 보면 세상의 모는 학문이 인문학이다. 예술,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영역도 인문학의 프리즘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예로 들어 보자. 핀치라는 새의 부리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살피면 종의 기원은 자연과학의 영역이다. 그렇지만 세상과 인간의 기원, 생성,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면 종의 기원은 인문학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 영화와 뮤지컬로 만들어지듯이 인문학과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섞인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서양의 학문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신화와 인간의 역사가 혼재되어 있듯이 학문의 경계는 없었다. 탈레스는 수학자이면서 철학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과 자연과학, 사회과학을 함께 연구했다. 서구의 이러한 학문적 전통은 중세와 근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스피노자는 과학자이면서 철학자였고, 버트란트 러셀은 수학자이기도 하고 철학자, 사회학자, 정치학자이기도 했다.동양에서는 주로 인문학을 자연과학과 분리된 학문으로 인식한다. 이것은 유교의 영향이다. 공자는 인문학을 개인과 사회의 규범적 체계로 인식하면서 철저하게 자연과학과 분리시켰다. 천문, 지리, 경제와 같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학문들은 천한 학문으로 여겼다. 동양의 고전이라고 일컫는 4서5경(논어, 맹자, 중용, 대학, 시경, 서경, 주역, 춘추, 예기)는 모두 인문학이다. 공자나 맹자와는 달리 관자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회과학을 통합적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만일 관자와 같은 경세적 학문이 국가를 통치하는 주도적 이데올로기로 채택되었으면 동양의 인문학도 서양의 그것처럼 범주와 내용이 훨씬 더 다양해지고 풍부해졌을 것이다. 감성과 이성, 도덕과 종교, 사회와 자연을 통섭적으로 인식할 때 인간과 세상은 좀 더 합리적으로 진화할 수 있다.
인문학 방법론
인문학은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기업과 사회가 인문학적 상상력을 갖춘 인재를 요구하고 있지만 막상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는 것은 쉽지 않다. 인문학을 잘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인문학과 연애를 하는 것이다.
인문학과 연애하라
커피숍에서 공원에서 극장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를 즐기듯이 인문학을 즐기라.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빠지고, 향기에 취하듯이 인문학의 눈에 빠지고 향기에 취하라. 연애에도 테크닉이 필요하듯이 인문학에도 테크닉이 필요하다. 무턱대고 접근하면 돈과 시간만 낭비할 뿐 아무런 소득이 없을 수 있다. 먼저, 쉬운 것부터 도전해보자. 가장 좋은 것은 문학 작품을 주제별로 선정해서 읽는 것이다. 주제는 구체성을 띠는 것이 좋다. 사랑과 결혼, 행복과 불행, 도전과 실패와 같은 주제보다는 행복한 삶과 이성적 사랑, 자유를 향한 젊은 날의 도전과 같은 것들이 더 좋은 주제다. 목표의식과 지향성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 후에는 반드시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단 한 페이지라도 읽은 내용을 정리해두는 것과 그냥 지나가는 것은 엄청난 차이다. 적자생존, 기록하는 사람만이 경쟁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다.
연애의 기술처럼 인문학에도 테크닉이 필요하다.
역사에 관한 기록물은 가급적이면 원전을 읽는 것이 좋다. 요약본이나 해설서를 열권 읽는 것보다 원전 한 권을 읽는 것이 더 유익하다. 사마천의 <사기>나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그 분량이 워낙 방대해서 원전 자체를 읽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원전이라야 작가의 진정한 체취를 느낄 수 있고, 그래야 인문학다운 인문학을 맛볼 수 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잊혀 진다. 그러나 고생 끝에 어렵게 얻은 것은 오래 간다. 원전을 읽지 않으면 인문학적 내공이 제대로 길러지지 않는다. 가장 어려운 것은 철학이다. 철학은 반복이 최선의 길이다. 한 번 읽어서 모르면 두 번 읽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또 다시 읽으라. 어렵다고 중간에서 철학을 포기하면 인문학 공부는 사상누각이 된다. 철학적 기반이 없는 인문학은 철근 없는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철학의 진수를 맛보려면 서양 철학을 두루 섭렵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시간적으로 무리가 따르면 시대별로 대표적 학자들의 저서를 선택적으로 읽는 것도 괜찮다. 근대철학의 여명기를 읽을 때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과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같이 읽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럴 여유가 없으면 데카르트의 책 하나로 범위를 좁혀서 읽는 것도 괜찮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끝까지 반복해서 데카르트를 읽어야 한다. 중간에서 접으면 철학적 내공은 절대 쌓이지 않는다. 반을 읽었다고 반만큼의 내공이 길러지지는 않는다. 동양 철학도 통사를 읽는 것보다는 고전을 직접 읽는 것이 좋다. 4서5경부터 시작해서 노자, 장자, 한비자, 묵자까지만 읽으면 동양 철학의 기본기는 갖추는 셈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이 동서고금의 진리다. 인문학 공부도 투자한 만큼, 노력한 만큼 그 열매를 거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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